성령의말씀

[스크랩] 칭찬 받는 교회와 성도가 되라. II (행2:42-47)

기쁘리 2012. 5. 28. 09:37

칭찬 받는 교회와 성도가 되라. II (행2:42-47)


우리는 지난주에 한국교회가 욕을 얻어먹고 있는 이유 가운데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그 해답을 찾고 있습니다.

지난주 말씀을 통해 초대교회 때는
교회가 굉장히 매력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를 많이 찾았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철저한 신앙교육이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철저하게 신앙교육 즉
예수님의 가르침에 열심이었고
초대교회 교인들도 열심히 가르친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누구도 내것을 내것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없이
서로 통용하며 아름답게 사는 모습이 매력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를 칭송했고,
그렇게 사는 성도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에 철저하게 순종했고
그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사도의 가르침 앞에서는 아니요 하지 않았고
오직 아멘. 예만 있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무조건 목회자의 가르침이 옳고
그 가르침에 찬성만 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특별한 문제가 없을 때는 가르침에 믿고 따라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가르치는 자의 권위가 사라져버렸습니다.

물론, 이 이유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목회자 스스로가 바르게 가르치지 못하고
올바른 본을 못 보인 책임이 있는게 사실입니다.

사실, 목회자는 돈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존경과 권위로 살아야 하고, 청빈의 모범을 보이며 살아야 하는 삶인데
그러질 못한건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지금의 목회자처럼 부유하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두벌의 옷과 돈주머니를 차지 않고 청빈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찌라도 우리가 그 가르침에 있어서 특별한 문제가 없는 이상,
우리 스스로가 가르침에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늘은 초대교회가 칭찬 받을 만한
두 번째 매력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초대교회의 매력 그 두 번째는 아름다운 교제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교제라는 말의 원어를 살펴보면
코이노니아.......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이 코이노니아가 우리 성경에는 단순히 교제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어의 뜻을 살펴보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교제, 사귐이라는 뜻도 있지만,
굉장히 충격적인 뜻도 있습니다.

 

그것은 동료의식, 또는 상호교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뜻이 있는데
요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압축된 말인데.
소통이라는 뜻입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초대교회의 매력은 단순히 교제의 차원을 뛰어넘어
교회와 교회, 성도와 성도, 교회와 이웃, 세상과 뭐가 이루어졌다?........
소통이 되는 곳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교회와 교회, 성도와 성도끼리만 소통 되는 곳이 아니라,
세상과도 소통되는 곳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교회가 혹은 성도를 볼 때
굉장히 매력적인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소통하였습니다.
가난한 자나, 부자나, 소외된 자, 눌린자, 건강한 자나, 병든자
모든 사람들과 소통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낮은자리를 찾아가셨고, 항상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지만 거들먹거리지 않으셨습니다.
겸손하셨고, 항상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죄인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요즘, 세상과 교회가 서로 소통이 단절된지가 꽤나 오래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교회와 교회, 교회와 세상간의 소통이 단절되었습니다.

제가 요즘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갈수록 우리 교회들이 세상이 소통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가 세상과 소통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 이웃들이 어떤 생각으로 교회를 바라보는지,
또, 교회가 이웃들에게 어떤 모습과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또, 우리 사회가 우리교회들에게 어떤 기대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 밖에 모릅니다.
세상이야 어떻게 되던 우리 생각밖에 안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욕하면, 교회를 잘 몰라서 욕한다 그러고.
그런 사람 몇 사람 안된다고 그러고......말아버립니다.

지금 세상이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무시해 버립니다.
뭡니까? 불소통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계속해서 교회와 세상은 단절만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세상간의 이질적인 골이 더욱 깊어만 갑니다.

 


세상사람들도 교회를 보면서 너거끼리 잘먹고 잘살아라........그럽니다.
이웃들도 교회에 대해 갈수록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전도가 안됩니다.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집단, 광기어린 집단으로 이해합니다.
왭니까? 교회의 폐쇄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이해해야 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향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너네들 너무 물질주의, 세속화로 나간다......
너무 권력화 하는거 아니냐?........라는 비판에 귀를 기울이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소통이 됩니다.
그래야 교회가 세상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품어야지 세상이 교회를 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과 소통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세상과 교통하질 못합니다.
이것은 곧 교회가 점점 세상과 멀어지고 있다는 증겁니다.
교회는 교회, 세상은 세상. 이렇게 갈수록 간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요즘 안믿는 사람들과 대화해 보거나, 전도해 보면 알지 않습니까?

교회 한번 나오시죠?...예수 믿으세요? 그런말 하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당신들이나 잘 믿으시오.........그런답니다.

저도 전도하면서 그런 소리 자주 들었습니다.
믿는 당신들이나 잘하라고......잘 믿으시라고......무슨 말입니까?
당신들부터나 잘하라는 말 아닙니까?

그 말은 곧, 우리가 지금 잘못 하는게 많다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잘못믿고 사는게 너무 많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비판을 가볍게 넘겨 버립니다.
안믿으면 그 사람들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소통의 단절의 한 단면들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소통해야 하고, 교제해야 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 서로간에도 동료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그 중에 하나가 우리는 세상과 가까이 하면 세속화에 물들까봐 두려워합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교회가 세상에 대해 자신감을 잃어버린 증거입니다.

우리는 말씀에 약합니다.
그 말은 주님의 말씀대로, 말씀을 교육받은 대로 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말씀은 강합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2가지 무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말씀의 무기요, 하나는 기도의 무깁니다.
그것으로 세상과 소통해 나가야 하는데, 그 무기를 도구를 잃어버리고 삽니다.

말씀의 검을 날카롭게 갈아서 (히 4:12)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는 능력이 있는데

그 능력을 우리는 지금 잃어버리고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가지고 살면,
우리의 신앙은 강하게 뿌리내리게 되어 있고
세상에서도 말씀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럴 때, 세상과도 소통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의 능력이 지금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말씀의 검이라는 성도의 무기를 잃어버린지 오랩니다.
말씀의 검의 날이 무디어 지고 녹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그런 강함이 없으니 세상으로 나갈 수가 없고
소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지배합니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흡수합니다. 이게 진리입니다.

우리가 철저한 신앙교육 아래 말씀을 뿌리내리고 산다면
세상은 교회를 따라 올 것입니다. 아니,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초기 교회가 그랬습니다.
교회는 항상 사회보다 앞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사회를 이끌어 갔고,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역전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따라하고, 따라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신앙 안에서 옳고 그름의 판단력이 흐려져 있고
말씀 가운데, 믿음으로 분명하게 살지 못하고,
자신감 있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분명한 신앙관을 가지고 말씀대로 자신감 있게 살면
세상은 우리를 따라오게 돼 있습니다.
얼마든지 세상과 소통하며, 교제하며 살수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그랬습니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신앙교육에 의해
확고한 믿음의 생활을 하는 가운데 서로 아름다운 소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날마다 믿는 자의 수가 더하여 갔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내가 확실한 믿음 가운데, 믿는 이답게 생활하면
자신감 있게 생활하게 되고, 당당하게 됩니다.
칭찬 받는 교회, 칭찬 받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 생활을 잘 하지 못하면
항상 눈치보고, 떳떳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차입니다.

 

소통은 자신이 먼저 당당해야 하고, 꿀릴게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 당당함을 인정받을 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럴 때, 부흥하게 돼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교제, 소통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끊이없이 주님처럼 낮아져야하고, 섬겨야하고,
말씀에 복종하는 삶의 능력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살지만,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항상 어중간하고 불분명하게 사니까 욕을 먹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 자면 믿는자 답게 살아야 합니다.
박쥐같은 신앙인이 되면 안됩니다.

(계 3:16)절에 아주 무서운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소통과 교제는 먼저 자기의 정체성이 분명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나 교인들은 신앙정체성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믿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갔고
소통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의 신앙정체성을 분명히하고
믿는자답게 말씀을 우리 삶속에 이루며 사는
그래서 칭찬받는 사람, 칭찬받는 교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두란노7310
글쓴이 : 강물처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