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유래한 한자성어 중에 ‘함포고복(含哺鼓腹)’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린다’는 뜻으로, 중국인들은 풍족하고 유쾌한 삶의 조건으로 무엇보다도 배불리 먹는 것을 들었다.
물론 우리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겠지만, 우리 민족은 여기에다 한 가지 조건을 더 추가시켰다. 등까지 따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함포고복이라는 말 대신에 이런 말을 만들어 즐겨 사용해 왔다. ‘등 따습고 배부르면 정승 부러울 게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등을 따습게 할 수 있었던가. 여기에 바로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주거 양식, 난방 장치인 구들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한 겨울에 우리 한국인은 불이 잘 든 뜨끈뜨끈한 구들장에 누워야만 비로소 제대로 잠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구들(장)지다’는 ‘잠자다’ 또는 ‘눕다’와 같은 의미로 쓰였고, 이래저래 한국인들은 모두가 ‘구들장 지기’였던 것이다.
언제부터 사용됐나
함경북도 웅기지방의 청동기시대 움집에서 구들의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보고되어 있지만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다. 문헌 기록으로는 중국의 『구당서(舊唐書)』에 나오는 게 가장 오래다.
이 책 고구려 항에 나오는 “겨울철에는 모두 긴 구덩이를 만들어 밑에서 불을 때어 따뜻하게 한다(冬月皆作長坑下然溫火亂取援)”는 구절로 보아 삼국시대의 고구려에서 사용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어 4-5세기에 활발해진 북방계 민족의 남하운동에 따라 백제나 통일신라 시대에 점차 남쪽 지역에까지 이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 조선 초기에 들어와 북부 및 중부 지방은 물론 남부지방까지 구들을 이용한 가옥들이 지어지기 시작했다는 기록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구들이 우리 민족 고유의 가옥 난방 장치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구조와 모양이 있는가
구들은 ‘방구들’의 줄임말로 ‘온돌’이라고도 한다. 그림에서 보듯 구들은 크게 세 부분, 즉 아궁이·고래(불길)·구들장 그리고 여기에 개자리·연도·굴뚝 등을 추가하여 이루어진다. 구들장 위는 흙을 덮어서 방바닥 또는 마루를 이루게 하는데 따라서 구들은 불지핌에서부터 불의 이동 및 불의 보관까지를 겸한 아주 다양한 용도와 목적의 연소 및 난방 시설이다.
아궁이에서 굴뚝 연도까지 도랑 모양으로 축조하고 그 위에 구들장을 덮어 연기가 흘러나가게 만든 곳을 구들고래 또는 방고래라 하며 구들장을 받치는 것을 두득이라 한다.
굴뚝이 있는 벽과 평행으로 깊게 파낸 고래를 특히 개자리라 하는데 이것은 역풍을 방지하기 위해 판 도랑으로 구들고래가 끝나는 주위의 벽과 고막이 안에 깊게 만든 고래로써 대개 불아궁이의 반대편 벽쪽에 만든다.
이 외에도 불기운이 이곳에 마지막으로 저장됨으로써 보온 기능을 극대화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굴뚝 바로 밑의 개자리로 연기가 넘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고래의 깊이와 너비는 방의 크기와 아궁이와 굴뚝의 거리 또는 구들장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고래에는 구들장을 놓는 방법에 따라 줄고래(나란히 고래), 부채 고래(선자 고래), 맞선 고래, 허튼 고래, 굽은 고래 등이 있다(그림 참조).
한국인과 함께 존재할 구들
구들을 이용한 난방법은 주로 온도가 높아진 돌이 방출하는 열을 이용하는 것으로 열의 전도와 복사, 대류 등을 모두 이용한 난방법이다.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난방법으로 열 효율이 좋고 연료나 시설이 경제적이며, 반영구적이라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주로 열의 전도에만 의존하는 난방법이기 때문에 아랫목과 윗목의 온도 차가 심하고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방을 밀폐시켜야 하며 연료 조달이나 온도 조절이 어렵다는 것 등 여러 단점으로 인해 요즘 짓는 가옥에서는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방구들에 엉덩이를 붙이고 배 깔고 등을 대야 진정으로 따듯하고 즐겁고 배부를 수 있던 한국인, 추운 겨울 밖에서 돌아와 맨 먼저 한 일이 따스한 아랫목 구들에 손을 넣던 한국인이 사라지지 않는 한 구들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것이다.
엉덩이며 손이며 등짝 살갖에 ‘쩍’하고 달라붙던, 화들짝 불에 데인 진한 입맞춤과도 같던 방구들 장판의 그 맛과 멋을 잊을 수 없는 ‘우리’들이 존재하는 한다.
발췌 : CJ 생활속의 이야기
사진 : 김대벽 (문화재전문 사진작가)
요즘처럼 찬바람이 속살을 파고들 즈음이면 군불로 데워진 뜨끈한 온돌방이 제격이다. 겨울비라도 내려 몸과 마음이 눅눅해지면 온돌의 아랫목은 더 없는 극락이다.
그렇지만 자연을 이해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 생활도 쉬운 것은 아니다. 장작불을 때는 부엌은 그을음이 부뚜막으로,벽으로 갈수록 더해간다.게다가 연기란 놈이 집안 구석구석 숨었다 가기 때문에 아무리 옷을 잘 빨아 넣어두어도 갈아입을라치면 언제나 ‘시골냄새’라는 불내(불냄새)가 ‘군군’하게 풍겨나니 말이다.
지금처럼 석유나 가스,페치카의 불도 좋지만,그래도 장작불만은 덜하다. ‘ 구운 돌 위에 사는 즐거움’이란 곧 자연의 정을 체감하는 사람 사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나이든 세대들은 이 온돌방의 추억을 지금도 따습게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민족의 정서가 세계에 유례없는 온돌문화를 만들어 냈다.
●전설의 온돌방
최근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머무른 절로 유명한 경기 양주 회암사지(檜巖寺址,사적 제128호)에서 국내 최대 규모의 온돌시설이 원형에 가깝게 발굴됐다.
공동조사단 장경호 단장은 “온돌시설이 확인된 건물지는 고려말에 목은 이색이 작성한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의 건물배치로 볼 때 ‘서승당(西僧堂)’에 해당한다”고 했다.
이 온돌시설은 중앙통로를 사이에 두고 ㅌ자 형으로 서로 마주보도록 구들이 깔려 있는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고 한다.
아궁이에서 장작불을 때면 연도(煙道,연기길)를 따라 방의 구들을 덥힌 뒤 일(一)자로 뻗은 중앙 통로 바닥을 거쳐 건물 뒤쪽에 설치된 굴뚝으로 연기를 배출하는 보온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회암사의 온돌은 경남 하동 칠불사의 아자방(亞字房)과 유사한 구조로 확인됐다.아자방의 경우 신라 효공왕 때 담공선사가 세운 것으로 “한번 불지피면 온기가 마흔 아홉 날을 갔다”는 전설의 온돌방이다.그러고 보면 회암사도 실용·효과면에서 칠불사 아자방 못지 않았을 것 같다.
옛 건물의 구들은 자연의 힘과 불의 힘을 가장 적절하게 활용해 만들어졌다고 여겨진다.완벽하게 방습 처리하고,바람 세기,굴뚝의 위치나 높이,방향 등 지역 조건을 잘 맞추었을 것이다. 그래야 온기가 오래갔을 테니. 결국 구들은 우리 민족이 불을 얼마나 잘 다루었는가를 웅변하는 문화 요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구들의 구조는 간단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과학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구들장은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뜨거운 열기가‘(구들)고래’라 불리는 공간을 지나면서 달구어진다. 식은 연기는 굴뚝을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아궁이와 고래 사이엔 ‘부넘기’가 있다.
불이 넘어가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넘기와 고래, 고래와 굴뚝 사이엔 각각 연기의 역류를 막는 ‘구들개자리’ 와 ‘고래개자리’ 가 있다. 우리의 구들은 허공을 돌로 가두어 열기와 연기가 순환하도록 한, 단순하지만은 않은 문화였다.
‘구들’은 ‘구운 돌’이라는 뜻의 순수 우리말이다. ‘온돌’ 은 한자 표현이다. 구들은 중국 문헌 ‘진서’서이전에 따르면 기원전 300 년 이전에 한반도 북부 압록강· 두만강 유역과 만주지역에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구당서’ 고구려편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긴 겨울을 나기 위해 길다란 갱(坑)을 만들어 따뜻하게 난방한다” 고 기록하고 있는데,이 갱이 바로 구들의 원형으로 보인다.
●부지런한 자가 먼저 온돌에 앉는다.
온돌(구들)문화는 글자 그대로 돌을 달굴 정도로 자연과 붙임이 많아야 살아 갈 수 있는 문화이다. 우리 정서를 이것으로 압축할 수 있다고 하는 것도 우리의 부지런한 생활을 반영하고 있어서다.
구들을 데우려면 땔거리를 준비하는 일도 만만치 않은 데다가, 기실 방 몇 개 데우려면 그야말로 장작패는 일이 쉽지 않다. 가끔 옹이가 있는 솔둥걸이 라도 만나면 기진맥진해서야 끝이 난다.
불 때는 것도 처음에는 밑불로 솔가지와 솔방울 몇 개를 놓고 잔불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처음에는 으레 연기가 구들로 들지 않고 나오기 때문에 곤혹스럽다.
그래서 인생처럼 불도 조심스레 달래는 요령이 필요하다.
여하간 구들은 구들장 베고 누워 여유부리는 게으른 자들에게는 커다란 애물일 수도 있으니, 요사이 난방보일러는 그들에게 구세주일 게다.
지난 주 추위는 강풍을 동반했다. 이곳 서당아이들 가운데 집이 먼 녀석들은 추위를 녹인다며 군불더미에 조약돌을 구워 주머니에 넣고 나섰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하더냐?” 는 물음에 “그냥요” 라고 답하는 아이들을 보니 거북이가 알 깨고 나와 제 어미에게 배우지 않아도 하는 수영처럼, 느낌으로도 조상의 삶을 잘도 꿰차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꽁꽁 얼어붙은 시골저녁, 오늘은 정말 군불 지핀 구운 돌(온돌)위에 등을 붙이고 누우니, 수 천년 이어진 선조 들의 삶이 따끈따끈한 온돌로 다가오는 듯 하다.
글 : 민홍규-우리문화읽기
'등 따습고 배 부르니 ~을 한다' 는 말이 있다. 사람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등 따습고 배부른 기초 욕구가 충족되고 나서 다음 행위를 하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에게는 '등 따스우면 배 부르다' 는 속담도 있다. 추운 날 설설 끓는 방에 누워 있으면 배고픈지조차 모른다는 말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에게 따스함은 먹는 것보다 더 원초적인 욕구다.
신라 선덕여왕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땔 나무와 양식을 골고루 나눠주는 덕을 쌓아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았다. 땔나무는 음식을 끓이고 몸을 덥힐 뿐 아니라 마음까지 따뜻하게 하는 불을 만든다. 그 땔나무의 불과 돌이 만나 움집의 아득한 옛날부터 오늘 아파트 시대까지 우리 민족의 몸과 마음을 따뜻이 감싸주고 있는 것이 온돌이다.
온돌을 덥히는 땔나무는 산업화에 따라 연탄으로, 경유로, 도시가스로 달라졌지만 방바닥을 덥히는 온돌의 온기는 여전하다. 40 대 이상 세대들은 아궁이와 부뚜막, 아랫목이 까맣게 달아오른 온돌방의 추억을 지금도 따습게 간직하고 있다.
찬 봄비가 주룩주룩 내려 몸과 마음이 눅눅해지면 그때로 돌아가 아궁이에 불도 지피고 아랫목에서 등도 '지지고' 싶다. 이런 민족의 정서가 세계에 유례없이 아파트에 온돌방.거실을 설치했는가 하면 온돌 침대를 낳고 도심의 찜질방이 성황을 이루게 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짚으로 지붕을 잇고, 겨울에 긴 구들을 만들어 따뜻하게 하였다' 고 당나라 역사서 '신당서(新唐書) ' 는 적고 있다. 당나라에는 없는 고구려만의 특색이었던 것이다. 암사동 선사유적지에서 발굴된 땅을 깊이 파내려간 움집 한가운데에도 불을 지피는 노(爐) 가 갖춰져 있다.
고고인류학자들은 난방.취사.조명 기능을 했던 이 노가 가옥의 구조 변화와 함께 온돌로 발전해간 것으로 보고 있다.
"복합 기능을 가진 노가 청동기 시대에 들어와 난방을 위한 방 가운데의 노와 취사를 위한 구석의 부뚜막으로 나뉘게 되고 다시 노와 부뚜막이 합쳐 아궁이.구들.굴뚝으로 이어지는 오늘의 온돌형태로 발전했다" 고 장경호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말한다.
삼국이 정립되기 훨씬 이전인 기원전 3세기께부터 우리는 온돌에 등을 덥히며 살아온 것이다.
온돌 구조는 크게 불을 때는 아궁이, 불길과 연기가 지나가는 고래, 고래를 덮는 구들장과 굴뚝으로 나뉜다. 이런 온돌에도 수천년 동안 궁리하고 발전시켜온 조상들의 지혜가 구석구석 배어 있다는 것이 김남응(단국대 건축공학) 교수의 설명이다.
"아궁이와 고래 사이로 불이 넘어가는 부넘기 혹은 불고개라는 턱을 둔 것은 열기와 연기의 역류를 방지하며 고래 속으로 잘 들어가게 하며 다시 고래가 끝나는 곳을 우묵하게 낯춘 개자리는 열을 마지막까지 활용하면서 굴뚝 등을 타고 들어온 빗물의 역류도 막아낸다" 고 김교수는 설명한다.
불길을 많이 받는 아랫목은 두꺼운 구들장, 윗목은 좀더 얇은 구들장을 얹고 그 위에 황토 등의 흙을 바른 것이 온돌방이다. 불을 때어 구들을 덥히는 전통 아궁이는 산업화와 함께 도시에서 연탄 아궁이로, 다시 보일러로 바뀌었다.
고래도 이제 불길이 아니라 뜨거운 물이 지나가는 파이프나 전기 열선으로 대체됐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온돌의 전통을 악착같이 계승해 등을 따습게 하고 있는 유일한 민족이다.
"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라는 우리의 인사는 등 따습게 잘 주무셨냐는 말입니다. 온기가 있는 것을 우리는 생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등골이 식었다고 하지않습니까. 방에 누워 따스한 온기를 받으며 우리는 살아있음을 편안하게 느낍니다. 불과 돌과 흙이 어우러져 순환의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 온돌입니다."
돌 문화에 특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윤재근(한양대 국문학) 교수는 나무와 불과 돌과 흙이 순환하며 빚어내는 온기, 태초의 생명이 온돌이고 우리는 거기에 누워 매양 편안하게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곧 불이면서도 어머니 양수 속 같은 재생의 공간이 온돌방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산비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무스름한 운모류의 판석은 열에 강하고 열전도율도 낮아 오랫동안 열을 머금을 수 있어 구들장으로 많이 쓰인다. 이 판석이 열을 받으면 원적외선이 많이 발생한다는 연구도 나왔다. 따스한 공기는 위로 올라가기에 바닥난방인 온돌은 스팀난방 등에 비해 아래로부터 위까지 따스하게 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난방법이다.
이런 온돌난방을 현대화.세계화하기 위해 1996년에 구들학회(회장 최영택) 가 창립됐다. 건축.열 역학.문화 관련 교수와 온돌개량 사업가 등 3백여명의 회원을 가진 이 학회는 한해 두차례 세미나 등을 개최, 우리 민족 문화와 생명의 뿌리인 온돌을 탐구하며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반평생을 온돌 현대화를 위해 힘써온 최영택 회장은 "독일.프랑스.일본 등에서는 바닥난방이 과학적이며 에너지 절약에도 도움이 돼 공업회 등을 결성하고 있는데 정작 종주국인 우리는 등한시하고 있다" 며 사라져가는 구들 명장들을 한시바삐 인간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요망했다.
"온돌은 우리 민족 생명의 그릇이며 문화의 바탕" 이라는 김남응 교수의 말이 아니더라도 현대인들은 따스한 온돌에서 생명의 위안을 얻는다. 그 따스함이 현대의 스트레스를 불끈 땀으로 밀어내며 또다시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