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대구청년유도회에서 전시한 탁본 중에 명말 청초의 명필 왕탁(1592~1652)이 쓴 이백(701~762)의 시 <망여산폭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글씨를 왜 서예라고 하며, 글씨가 어째서 예술품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태백이 지은 이 시는 후대 송나라의 소동파가 <예로부터 상제가 드리운 은하 한 줄기를 제대로 전한 것은 고금을 통털어 오로지 이백의 이 시 한 수가 있을 뿐이다.>라고 하며, 고금의 절창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이 시의 풀이는 이러합니다.
望廬山瀑布(망여산폭포) ; 여산폭포를 바라보며 - 이백(李白)
日照香爐生紫煙(일조향로생자연) : 향로봉에 해 비치니 자주빛 안개 피어오르고
遙看瀑布掛長川(요간폭포괘장천) : 아득히 폭포 바라보니 긴 강이 하늘에 걸려있구나
飛流直下三千尺(비류직하삼천척) : 날아 솟았다 바로 떨어진 물줄기 삼천 척
疑是銀河落九天(의시은하락구천) : 이것은 혹 은하수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 아닐까
이렇게 유명한 한시이다 보니 이 시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글씨에 있어서는 그 어느 작품도 왕탁의 서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으며,
더구나 그림에 있어서는 중국 작가가 그린 위의 그림도 뛰어나지만, 놀라웁게도 우리나라의 겸재 정선(1676~1759)이 그린<여산폭>에 견줄만한 작품이 눈에 띄질 않을만치 겸재가 그린 여산폭은 훌륭하기 그지 없습니다.
겸제가 낙관 아래 써 놓은 화제 또한 그림에 못지 않게 멋드러집니다.
<장송은 울창하여 천병이 열을 선 듯
성난 물줄기 급히 쏟아지니 만마가 치달리는 듯>
고등학교 시절, 국어선생님께서 중국인들의 허풍이 얼마나 센지를 설명하시면서 그들의 과장된 표현을 이 시의 구절 <비류직하삼천척>을 예로 들어 폭포의 물길이 삼천척이나 된다고 허풍을 떨었다고 설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삼천척을 요즘의 자수로 치면 한자가 30.3cm이니 약 1,000미터,1km에 해당하는 길이입니다.
여산폭포래야 일백미터 남짓한 폭포인데, 이를 열 배나 뻥튀겨 시를 남겼으니, 그들이 아마도 진짜로 일천미터 높이의 남미 베네주엘라에 있는 세계 제일의 엔젤폭포의 장관을 보았다면(엔젤폭포의 높이는 979미터) 어떻게 표현해 내었을지 웃음이 나옵니다.
<여산폭포 전경>
<세계에서 제일 높은 물줄기를 자랑하는 엔젤폭포의 장관>
<내 고향 양산의 자랑거리 - 홍룡폭포>
<인물탐구>
이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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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 | |
출생 | 701년 쓰촨 성 쇄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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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762년 안후이 성 당도 |
직업 | 시인 |
국적 | 당나라 |
장르 | 시 |
주제 | 도교, 술 |
주요 작품 | 산중문답(山中問答) 청평조사(淸平調詞) |
이백(李白, 중국어 병음: Lǐ Bái, 701년 ~ 762년)은 중국의 시인이다.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촉나라 쓰촨 성 출생이다. 두보와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힌다. 이 두 사람을 합쳐서 이두(李杜)라고 칭하고 이백을 시선(詩仙)이라 부른다. 현재 약 1100여 수의 시들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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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이백은 촉나라 쓰촨 성에서 태어났다. 이백의 아버지가 중앙 아사아에서 장사를 하던 무역상이었기 때문에 이백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25세나 26세까지 고향인 촉나라에서 살면서 동암자(東巖子)라는 선인과 쓰촨 성의 산들을 오르며 도교를 수양하였다. 25세나 26세에 고향을 떠나 강남(江南)을 여행하였으며, 아버지의 유산을 소비하며 몰락한 귀족의 자제들과 어울렸다. 724년 43세에 현종의 칙령을 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어 장안(長安)에 머물렀으나 관리의 따분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44세에 헌종의 측근인 고역사(高力士)와 다투고 사직하였다. 사직 후에 낙양에서 산둥까지 두보와 함께 여행하였다. 54세에 다시 강남으로 돌아와 56세에 현종의 열여섯 번째 아들인 영왕 인(永王 璘)의 군대에 참여하였으나 영왕의 군대가 숙종에 의해 반란군으로 지목되어 이백도 야랑(夜郞, 지금의 구이저우 성)에 유배되었다. 다행히 삼협(三峽) 부근까지 왔을 때에 은사(恩赦)를 받아 다시 강남으로 돌아왔다. 만년에는 강남의 각지를 유람하였고, 62세에 안후이 성 당도(安徽省當塗)의 현령(縣令)이었던 조카 이양빙의 집에서 사망하였다. 이백이 장강(長江)에 비치는 달 그림자를 잡으려다가 익사했다는 전설도 있다.
[편집] 작품
이백은 고시(古詩)와 절구(絶句)를 특기로 했다. 그의 절구는 '신품(神品)'이라고 평해졌고, 그의 시재(詩才)는 천래(天來)의 재, 즉 '천재(天才)'라고 했다. 그의 시는 스케일이 크고, 또한 박진감이 있으며, 때때로 환상적이다. 또한 그의 시는 매우 자유로우며 많은 고민을 하지 않고 한 번에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동시대에 살았던 11세 연하의 시인 두보(杜甫)가 1자 1구의 조탁(彫琢)에 뼈를 깎는 고심을 기울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한편 술을 몹시 좋아하여 술에 취해 있을 때 현종의 부름을 받고 그대로 궁전으로 들어가 계속해서 시를 읊었다고 한다.
[편집] 영향
서유럽에 처음으로 번역된 것은 1862년 《당 시대의 시들》(Poésies de l'Époque des Thang)이다. 영어권에는 허버트 앨런 길레스가 1901년 중국 문학사를 펴면서 처음 실렸다. 자유로우며 시적으로 영향력있던 번역은 에즈라 파운드가 일본어로 번역된 이태백 시를 중역한 것이었다.
<왕탁>
[인명]
<겸재 정선>
정선 [ 鄭敾 , 1676~1759 ]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 광주(光州). 자 원백(元伯). 호 겸재(謙齋)·난곡(蘭谷).
약관에 김창집(金昌集)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畵員)이 되고 그 뒤 현감을 지냈다.
처음에는 중국 남화(南畵)에서 출발하였으나 30세를 전후하여 조선 산수화(山水畵)의 독자적 특징을 살린
사생(寫生)의 진경화(眞景畵)로 전환하였으며 여행을 즐겨 전국의 명승을 찾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심사정(沈師正)·조영석(趙榮)과 함께 삼재(三齋)로 불리었다.
저서에 《도설경해(圖說經解)》가 있고 그림 작품으로는 《입암도(立巖圖)》 《여산초당도(廬山草堂圖)》
《여산폭포도(廬山瀑布圖)》 《노송영지(老松靈芝)》 등이 있다
우리의 산천을 직접 다니며 우리 시각으로 그린 진경산수의 명작이 여러 점 나오는데, 특히 72세에 완성한
'금강내산(金剛內山)'은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암봉을 마치 한떨기 흰 연꽃송이처럼 화 폭에 담아내
진경산수의 결정체로 평가된다
정선은 기이한 산천의 모습이나 안개 낀 풍경 등 머리 속으로만 상상한경치를 그린 관념산수화에서 벗어나
우리 산천을 직접 보고 그린 진경(眞景)산수화를 완성했다.
“정선에 와서야 우리 산수화가 개벽되었다”는 같은 시대 화가 조영석의 표현처럼, 그는 조선 300년 산수화의
전통을 깨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낸 천재 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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