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장엄한 이별의 노래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장엄한 이별의 노래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보았습니다. 영화는 TV <인간극장>에서 본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물론 인간극장에 나온 익숙한 몇 장면이 다시 나오긴 했지만 그것은 일부이고, 영화 전반을 흐르는 분위기는 TV 와는 달리 다소 무거웠습니다. 인간극장이 행복한 모습에 초점을 뒀다면 영화는 이별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촬영기간(2013.9~2014.11)을 보면 이는 감독의 의도는 본래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노인의 건강은 알 수 없는 법. 감독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촬영 도중에 일어났고, 그리고 감독은 영화를 TV 와는 달리 그렇게 이별 쪽으로(?) 방향을 바꾼 듯합니다.
"그렇게
울 필요 전혀 없다. 평소 마음공부하신 분이라면, 그래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를 아는 분이라면(세상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로
구성되어 있음) 그럴 때 어떻게 해드려야 할지 잘 알 것이다. 두 번째, 아버님을 <찬탄해야> 한다. '아버님 참 잘 사셨다, 멋진 인생이셨다' 하고 떠나실 아버님이 아쉬움 없이 세상을 떠나시도록 해드려야 한다. 그래서 안심시켜 드려야 한다. 그리고 저희들은 아무 걱정이 없다, 훌륭히 키워 주셔서 저희들은 앞으로 살아가는데 아무 문제 없으니 아무 걱정 마시고 기쁘게 떠나시라,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떠나실 아버님. 그렇게 늙은 아버님을 떠나 보낼 아들은 늙고 병든 아버님 앞에서 그 때서야 비로소 잘 모시지 못한 데 대한 회한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이 흘립니다. 그러나 그게 모든 부모 자식 간의 업인 걸 어이하겠습니까. 부모는 아무리 자식들에게 잘해준다고 해도 돌아보면 늘 못해 준 게 더 많고, 자식은 아무리 효도한다고 해도,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게 또한 효도인 법. 그러니 부모는 자식에게 늘 죄인이고, 자식은 부모에게 늘 불효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이 이러한데 뭘 그리 비통해 하겠습니까. 다만 그렇게 알고 그렇게 바라보고 그렇게 뉘우치고 그렇게 보내드리면 될 뿐, 한탄도 후회도 할 필요는 없는 것. 부모는 자식에게 미안해 할 것도, 자식은 부모에게 죄책감 느낄 필요가 없는 것. 우리는 늘 그래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영화에는 감독이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묘한 복선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크게 아프시기 전인 초봄 어느 날인가 키우던 강아지(?) 한 마리가 갑자기 죽는 일입니다. 작아서 꼬마라고 불리던 그 강아지는 TV 에서는 할아버지 앞에서 두 발로 서고 재롱도 떨던 녀석인데, 무슨 일인지 갑자기 죽는 것입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강아지를 묻어주던 할머니는 네가 갑자기 갈 줄은 정말 몰랐다며, 할아버지 가시고 네가 할아버지를 그리워할 줄 알았는데 네가 먼저 가다니...하며 눈물짓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라 감독이 각색할 리는 전혀 없을 터. 그렇게 강아지는 할아버지의 떠나심을 암시합니다.
또 하나는 새로운 새끼들의 탄생입니다. 두 분이 키우시던 공순이(공짜로 얻었다고 해서 할아버지가 공순이라 부름)가 어느 여름날 암수 각각 세 마리씩 새끼 6 마리를 낳은 것입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슬하에 아들 셋 딸 셋 모두 육남매를 두셨습니다. 새끼들의 성별을 가리던 할머니는 그 사실을 발견하고 참 신기하다며 감탄하십니다. 이 또한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한데, 제가 보기에는 떠나실 할아버지의 환생(還生)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오래도록 그렇게 행복하게 산다 하더라고 이별은 피할 수 없는 법. 76년을 그렇게 소꼽부부처럼 잉꼬부부처럼 살았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운명입니다. 할아버지가 앓으실 때 석달만 더 있다 가라고 할머니는 말씀하시지만, 석달을 더 있는다 하더라도 떠나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할머니는 그것이 서러운 듯합니다.
그러나 서러워 할 것 없습니다. 우리도 먼저 가고 늦게 가는 차이만 있을 뿐, 우리 모두 저처럼 갑니다. 그러니 가는 분 간다고 울고불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슬픔이 일고 흐르는 눈물이야 굳이 막을 필요는 없겠지만 거기 붙들릴 일은 아닌 것입니다. 할아버지도 그렇게 오시고 나도 그렇게 왔고, 또 그렇게 가시고 나 또한 그렇게 갈 것입니다. 그러니 무얼 그리 아쉬워 울고불고 하겠습니까.
또한 장강(長江)의 앞물은 흘러가야 뒷물이 올 수 있는 법. 그렇게 해서 우리 모두가 장강이 되는 것인데, 앞물이 흘러가기 싫다고 계속 머무려 든다면 뒷물이 어찌 올 수 있겠습니까. 아마 차례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장강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앞물이 흘러가야 뒷물이 오는 것이며, 우주 전체가 그렇게 해서 오늘날 우주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냉동 인간이니 혹은 노화된 인체를 인공 장기로 바꿔 영생을 누리겠다느니 하는 인간의 바램이 얼마나 허황되고 잘못된 것인지...그럼에도 오늘날 우리는 그런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영원하기를 바라며 말입니다. 본래 영원할 수 없는 것을 그렇게 영원하게 만들려 합니다.
우리는 무아(無我)와 모든 존재가 실체가 없음(無自性)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슬픔에 젖지 않고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그럴 만한 요소(factors)가 복합적으로 모여 그렇게 된 것일 뿐, 실로는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물은 산소와 수소가 만나서 잠시 물이란 모습을 이뤘을 뿐이며, 전기로 산소와 수소를 분해하면 물은 사라지고 맙니다. 물질을 분해하여 원자 단위로 들어가면 그 물질의 고유 자성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사실은 실체가 없습니다. 잠시 인연이 모여 그렇게 존재할 뿐(假我)입니다. 그야말로 일본 대지선사(大智禪師)의 게송처럼 <유연즉주 무연거(有緣卽住 無緣去, 인연이 있으면 머무르고 인연이 없으면 가버린다)> 것입니다.
삶 또한 무대 위의 연극과 같습니다. 연극 속에서야 부부도 자식도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있지만, 연극이 끝나면 그런 사람이 더 이상 없습니다. 연극을 위해 무대 위에서 잠시 그런 관계를 맺었을 뿐, 사실은 부부도 자식도 사랑하는 사이도 미워하는 관계도 다들 아니었습니다. 단지 연극을 위해 무대에서 잠시 그런 관계를 맺었을 뿐입니다. 이걸 잘 알아야 삶에 속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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