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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장엄한 이별의 노래

기쁘리 2016. 4. 1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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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장엄한 이별의 노래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장엄한 이별의 노래


http://www.youtube.com/watch?v=ONiEOMm3PoA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보았습니다. 영화는 TV <인간극장>에서 본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물론 인간극장에 나온 익숙한 몇 장면이 다시 나오긴 했지만 그것은 일부이고, 영화 전반을 흐르는 분위기는 TV 와는 달리 다소 무거웠습니다. 인간극장이 행복한 모습에 초점을 뒀다면 영화는 이별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촬영기간(2013.9~2014.11)을 보면 이는 감독의 의도는 본래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노인의 건강은 알 수 없는 법. 감독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촬영 도중에 일어났고, 그리고 감독은 영화를 TV 와는 달리 그렇게 이별 쪽으로(?) 방향을 바꾼 듯합니다.


 영화는  늦여름의 산골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가을을  지나  곧 겨울로 들어갑니다. 그 때까지 할아버지 모습은 TV에서 본 것과 다름없습니다. 건강하고 유머 넘치고 할머니와 사랑놀이도 여전하십니다. 그러나 다음해 들어서는 장면에 오면 할아버지 모습이 적어도 제 눈에는 확연히 달라지십니다. 우선 호흡이 거칠어지셨습니다. 또 깊은 숨을 못 쉽니다. 그저 얕고 빠른 숨을 쉬십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래 걷지도 못하고, 나들이 가는 장면에서는 힘들어서 쉬시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벌써 호흡기 계통에 문제가 온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폐에 물이 찼거나 심부전이 온 듯), 아니나 다를까, 할아버지는 잠을 잘 때도 기침으로 잠을 못 이루시고, 병원에서는 해 드릴 것이 없으니 (병원에) 오시지 말라는 말씀도 들으십니다. 기력이 떨어지는 것도 눈에 보일 정도입니다. 또 목소리를 들어보면 건강 상태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는데, 목소리도 과거 TV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많이 노쇠해지셨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이별할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후반부를 그렇게 이별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야기로 이어갑니다.


영화 보는 내내 돌아가신 아버님 어머님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가시는 할아버지 모습이 어찌 그리 아버님 가시던 모습과 비슷할까요. 또 할아버지 가시고 난 뒤 할머니 모습도 아버님 보내신 뒤 어머님 모습과 어찌 그리 비슷한지, 벌써 십 년이 훨씬 지난 일이지만 아버님 어머님 생각이 절로 났습니다.


영화는 놀랍게도 노부모를 둔 흔히 보는 가족 간의 갈등을 여과없이 보여줍니다. 영화 찍는 도중이라 웬만하면 그러지 않을 듯도 한데, 영화에서 장남과 장녀는 부모님 모시는 문제로 크게 다툽니다. 그것도 할머니 생신 축하하러 자식들은 물론 손자 손녀까지 다 있는 상태에서 그렇게 크게 싸읍니다.  자식들 생신 축하에 즐거워하던 두 분은 싸움 앞에 한 마디 말씀도 못하시고 그저 지켜만 보시며 난감해 하십니다. 특히 그렇게 늘 웃고 즐거운 표정이시던 할아버지는 안절부절, 더욱 당혹하고 슬퍼지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주름진 얼굴이, 온통 주름으로 일그러지십니다.


할아버지가 편챦으시다는 연락을 받고 맨 먼저(?) 내려온 막내 딸은, 노환이라 병원에서도 포기했다는 말을 듣고 아빠 아빠 부르며 마구 웁니다. 그 장면에서 저는 그게 아닌데, 그럴 필요가 없는데, 그러면 안 되는데, 이렇게 해야 하는데,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습니다. 저라면 그 따님 분에게 이런 조언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울 필요 전혀 없다. 평소 마음공부하신 분이라면, 그래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를 아는 분이라면(세상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로 구성되어 있음) 그럴 때 어떻게 해드려야 할지 잘 알 것이다.
 우선 저희들을 잘 키워주신 데 대한 <감사>를 해야한다. 저희를 낳아주시고 그 어려운 시절 온갖 정성으로 사랑으로 이렇게 키워주신 데 대한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아버님을 <찬탄해야> 한다.  '아버님 참 잘 사셨다, 멋진 인생이셨다' 하고 떠나실 아버님이 아쉬움 없이 세상을 떠나시도록 해드려야 한다. 그래서 안심시켜 드려야 한다. 그리고 저희들은 아무 걱정이 없다, 훌륭히 키워 주셔서 저희들은 앞으로 살아가는데 아무 문제 없으니 아무 걱정 마시고 기쁘게 떠나시라,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끝으로, 아버님 자식으로 태어나서 정말 행복했다고 감사의 인사로 마무리하면 울 필요가 전혀 없다. 우는 대신에 이런 말씀을 드려야 한다.


덧붙여, 종교가 있는 분이라면 경전의 좋은 말씀을 들려드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도 미리 미리 드려서 돌아가신 후 낯선 세계에 당황하지 않게 해드려야 한다."

 
영화는 또 이제 늙어 떠나시려 하는 부모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자식의 뜨거운 참회도 보여줍니다. 병원으로부터 희망 없다는 말을 들은 장남은, 홀로 시골로 내려와 할아버지께 아버님 고생하신 거 다 안다며 잘못했다며 눈물을 펑펑 흘립니다. 자식이 그러거나 말거나 할아버지는 무표정(?)하십니다. 그것은 자식의 눈물어린 참회를 받아들이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당신의 몸이 너무 힘드신 때문일 것입니다. 몸이 이승을 떠날 즈음에는 <괜챦다> 한 마디 하시기조차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떠나실 아버님. 그렇게 늙은 아버님을 떠나 보낼 아들은 늙고 병든 아버님 앞에서 그 때서야 비로소 잘 모시지 못한 데 대한 회한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이 흘립니다. 그러나 그게 모든 부모 자식 간의 업인 걸 어이하겠습니까. 부모는 아무리 자식들에게 잘해준다고 해도 돌아보면 늘 못해 준 게 더 많고, 자식은 아무리 효도한다고 해도,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게 또한 효도인 법. 그러니 부모는 자식에게 늘 죄인이고, 자식은 부모에게 늘 불효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이 이러한데 뭘 그리 비통해 하겠습니까. 다만 그렇게 알고 그렇게 바라보고 그렇게 뉘우치고 그렇게 보내드리면 될 뿐, 한탄도 후회도 할 필요는 없는 것. 부모는 자식에게 미안해 할 것도, 자식은 부모에게 죄책감 느낄 필요가 없는 것. 우리는 늘 그래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영화에는 감독이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묘한 복선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크게 아프시기 전인 초봄 어느 날인가 키우던 강아지(?) 한 마리가 갑자기 죽는 일입니다. 작아서 꼬마라고 불리던 그 강아지는 TV 에서는 할아버지 앞에서 두 발로 서고 재롱도 떨던 녀석인데, 무슨 일인지 갑자기 죽는 것입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강아지를 묻어주던 할머니는 네가 갑자기 갈 줄은 정말 몰랐다며, 할아버지 가시고 네가 할아버지를 그리워할 줄 알았는데 네가 먼저 가다니...하며 눈물짓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라  감독이 각색할 리는 전혀 없을 터. 그렇게 강아지는 할아버지의 떠나심을 암시합니다.

 

 또 하나는  새로운 새끼들의 탄생입니다. 두 분이 키우시던 공순이(공짜로 얻었다고 해서 할아버지가 공순이라 부름)가 어느 여름날 암수 각각 세 마리씩 새끼 6 마리를 낳은 것입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슬하에 아들 셋 딸 셋 모두 육남매를 두셨습니다. 새끼들의 성별을 가리던 할머니는 그 사실을 발견하고 참 신기하다며 감탄하십니다. 이 또한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한데, 제가 보기에는 떠나실 할아버지의 환생(還生)이 아닌가 합니다.


 영화는 이제 이별의 시간으로 들어섭니다. 마지막 이별의 순간, 얼굴을 쓰다듬으며 못내 이별을 아쉬워하는 할머니를 두고 할아버지는 다시는 못 올 길을 그렇게 떠나십니다. 할아버지 가시면 이제 겁 많은 할머니 화장실에는 혼자 어떻게 가실꼬.  그리고 할머니 떠나실 때 화장실도 겁이 나 못가시는 할머니께서 저승길은 혼자 또 어떻게 가실지, 할아버지는 아는지 모르시는지 그렇게 무심하게 홀로 떠나셨습니다. 함께 손잡고 떠나면 얼마나 좋을꼬 라는 할머니를 두시고...


 그렇게 떠난 할아버지가 입던 옷을 어느 눈내리는 날 무덤가에서 모두 태운 할머니는, 할아버지 무덤을 몇 번이나 쓰다듬은 후 떠나시다 얼마 가지 못해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통곡을 하십니다. 영화는 그런 할머니를 오래도록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오래도록 그렇게 행복하게 산다 하더라고 이별은 피할 수 없는 법. 76년을 그렇게 소꼽부부처럼 잉꼬부부처럼 살았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운명입니다. 할아버지가 앓으실 때 석달만 더 있다 가라고 할머니는 말씀하시지만, 석달을 더 있는다 하더라도 떠나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할머니는 그것이 서러운 듯합니다.

 

 그러나 서러워 할 것 없습니다. 우리도 먼저 가고 늦게 가는 차이만 있을 뿐, 우리 모두 저처럼 갑니다. 그러니 가는 분 간다고 울고불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슬픔이 일고 흐르는 눈물이야 굳이 막을 필요는 없겠지만 거기 붙들릴 일은 아닌 것입니다. 할아버지도 그렇게 오시고 나도 그렇게 왔고, 또 그렇게 가시고 나 또한 그렇게 갈 것입니다. 그러니 무얼 그리 아쉬워 울고불고 하겠습니까.

 

 또한 장강(長江)의 앞물은 흘러가야 뒷물이 올 수 있는 법. 그렇게 해서 우리 모두가 장강이 되는 것인데, 앞물이 흘러가기 싫다고 계속 머무려 든다면 뒷물이 어찌 올 수 있겠습니까. 아마 차례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장강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앞물이 흘러가야 뒷물이 오는 것이며, 우주 전체가 그렇게 해서 오늘날 우주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냉동 인간이니 혹은 노화된 인체를 인공 장기로 바꿔 영생을 누리겠다느니 하는 인간의 바램이 얼마나 허황되고 잘못된 것인지...그럼에도 오늘날 우리는 그런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영원하기를 바라며 말입니다. 본래 영원할 수 없는 것을 그렇게 영원하게 만들려 합니다.

 

우리는 무아(無我)와 모든 존재가 실체가 없음(無自性)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슬픔에 젖지 않고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그럴 만한 요소(factors)가 복합적으로 모여 그렇게 된 것일 뿐, 실로는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물은 산소와 수소가 만나서 잠시 물이란 모습을 이뤘을 뿐이며, 전기로 산소와 수소를 분해하면 물은 사라지고 맙니다. 물질을 분해하여 원자 단위로 들어가면 그 물질의 고유 자성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사실은 실체가 없습니다. 잠시 인연이 모여 그렇게 존재할 뿐(假我)입니다. 그야말로 일본 대지선사(大智禪師)의 게송처럼 <유연즉주 무연거(有緣卽住 緣去, 인연이 있으면 머무르고 인연이 없으면 가버린다)> 것입니다.

 

 삶 또한 무대 위의 연극과 같습니다. 연극 속에서야 부부도 자식도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있지만, 연극이 끝나면 그런 사람이 더 이상 없습니다. 연극을 위해 무대 위에서 잠시 그런 관계를 맺었을 뿐, 사실은 부부도 자식도 사랑하는 사이도 미워하는 관계도 다들 아니었습니다. 단지 연극을 위해 무대에서 잠시 그런 관계를 맺었을 뿐입니다. 이걸 잘 알아야 삶에 속지 않습니다.


 영화는 건강하던 시절, 빨간 꽃이 장식되어 있는 커플옷을 입고 활짝 웃으며 가을 코스모스를 보며 <인생은 꽃과 같다. 봄이면 꽃봉우리가 피고 가을이면 지는데, 사람도 그만 봉우리가 지면 그만이다! 가야하는 게야!>라며 할머니께 일장 훈시(?)를 하시는 모습을 잠시 보여줍니다. 아마 할아버지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당신의 다음 앞날을 아신 듯합니다. 이어 말씀드린대로 무덤가에 서러워 주저앉아 소리내어 대성통곡하는 할머니를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영화 속 할머니는 이것저것 푸념이(?) 많으십니다. 저희 어머님도 말년에 그러셨는데, 아마 나이 드시면 어머니들은 다들 그렇게 되시는 모양입니다.


*우연인지 몰라도 영화 속 할아버지와 저희 어머님이 동갑이십니다. 할아버지는 작년에 가셨지만 저의 어머니는 12년 전에 떠나셨습니다. 영화 속 할머니와 똑같이 그렇게 먼저 가신 아버님을 그리워하시다 그렇게 가셨습니다.  엊그제 같은데, 벌써 12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