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석하우스총판/불가의말씀

[스크랩] 선(禪),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비법이다

기쁘리 2012. 7. 13. 18:53

 

  근래 우리 사회에서는 마음공부,특히 선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그런데 그 까닭이 아무래도 서양풍의 역류에 있는 것 같아 입맛이 쓰다.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다가 서양인들이 좋다고 소리를 질러 대니

 덩달아 춤을 추는 격인 듯해서 말이다.

 어찌 되었거나 선이 작금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창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선이라고 하면 무엇보다 우선 화두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공안이라고도 부르는 화두는 대부분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처럼

 언뜻 혹은 전혀 그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가귀감에서는 참선의 세 가지 요건을 신심(信心), 분심(憤心), 의심(疑心)이라고 했다.

 화두는 이 가운데 의심을 이끌어 내는 데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의심을 제대로 일으키지 못하는 화두는 소용이 없다.

 그런데 왜 선사들은 참선을 할 때 의심을 가지고 전진하라고 가르칠까?

 여기에는 두뇌생리학에 대한 선사들의 예지가 깃들어 있다.

 

 인간의 두뇌에 갖춰진 세포들은 줄잡아 이백억 개라고 한다.

 그리고 그 모두가 각각 컴퓨터 회로에 필적한다고 두뇌생리학자들은 말한다.

 아니 컴퓨터 회로보다 훨씬 정교해서 이른바 피드백 시스템,

 즉 출입이 자유로운 체계의 측면에서는 컴퓨터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고 한다.

 

 두뇌세포 하나하나는 세포 연결효소의 분비를 통해 그 기능을 발휘하는데,

 그 효소의 분비가 가장 왕성할 때가 바로 골똘히 의문에 잠긴 경우라고 한다.

 

 두뇌생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의 일생에서 가장 왕성하고도 본질적인 의문이

 제기되는 시기는 네다섯 살 때의 유아기로, 그때가 두뇌 발달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시기라고 한다.

 

 이때 형성된 두뇌 능력이 평생 유지된다고까지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터인가 유아교육의 중요성이 지극히 강조되고 있다.

 이른바 절대의문이라고 할 수 있는 "엄마,하늘이 왜 파랗지?", " 사람은 왜 죽는 거야?",

 "무지개는 왜 일곱 가지 색깔이야?" 등등과 같은 질문을 토해 내는 시기가 바로 그 시기임을 생각해 보면

 두뇌생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그런데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주입식 교육을 받게 되면 절대 의문은 멈추어 버리고,

 그 결과 두뇌발달이 정지된다고 한다.

 결국 주입식 교육이 인간의 두뇌 발달을 저해한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두뇌 구조를 감안하면 참선에서 화두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상당히 굳어진 두뇌세포를 가지고 출가한 승려들을 선사들은 끊임없는 의문으로 유도함으로써

 두뇌 발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지 않았나 하고 독일의 초심리학자인 라인 박사는 추측하고 있다.

 

 그는 유아기에 폭발적으로 발달한 두뇌의 역량은 주입식 교육과 더불어 더 이상의 발전이 도모되지 못한 채 정지되며,

 그 결과 대부분의 인간들은 일생 자신의 두뇌 역량의 십분의 일도 활용하지 못한 채

 몽땅 무덤으로 가져간다고까지 극언하고 있다.

 

 화두의 기능을 그렇게 정리하고 송나라 대혜선사의 가르침과 연결해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추출된다.

 대혜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일상생활이 모두 선이다. 선은 어떤 곳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생활 자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선은 선대로 있고 생활은 생활대로 따로 있다면 그것은 참다운 선이 아니다."

 

 대혜선사의 가르침은 삼라만상이 모두 선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삼라만상을 바라보며 끊임없는 통찰력을 기르라는 의미가 아닐까?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 눈 뜬 소경,귀 열린 귀머거리가 많은 현실을 생각해 본다.

 우리는 과연 현실을 살아가며 스스로 순간순간 주인공답게 처신하고 있는가?
 취생몽사나 다름없는 상태로 인생을 허망하게 흘려보내고 있지는 않은가?

 

 삼라만상이 선이라는 가르침은 삼라만상을 바라보며 끊임없는 의문과 그 해결을 통해 삶의 주인공이 되고,

스스로를 승화시키라는 가르침이다. 진리는 현상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며 현상 자체가 곧 진리임을 가르치는 말씀인 것이다.

 

 선문에서 " 이 자리가 영원의 자리요, 이 순간이 영원의 순간임을 자각하라." 라는 가르침과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현재에의 철저한 몰입이 선이라면 선에 따라 살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현재에 대한 집중력이 약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어떠한 일도 능률적으로 처리하지 못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과거에 대한 추억에 사로잡히거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 버리지 못함으로써

 현재의 자신을 망각하는 비극은 선의 생활화를 통해 교정이 가능하다.

 

 선을 하는 마음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거는 마음이고,

 한순간도 놓치지 않는 마음인 만큼 순간 속에 영원을 살 수 있는 자세를 기르는 비법이라고 할 만하다.

 

 선은 단 한 순간도 쓸모없이 보내는 것을 금기로 한다.

 순간이 영원이므로 매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라고 한다.

 그것은 곧 찰나의 순간에 모든 능력을 불사르는 것이다.

 

 그 순간에 하는 일에 몸과 마음을 몽땅 기울이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사람에게 부정적인 과거의 그림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충실할 따름이다.

 매 순간 충실하고 최선을 다하기 위해 그는 부처님 말씀을 끊임없이 탐구하며 기도하고 정진한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현실 속에서 영원을 걷는다.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그의 자세는 주위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숭고하게 비친다.

 그래서 자녀나 가정의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일이 없다.

 

 선적인 삶이란 법다운 삶이요, 부처님의 마음 따라 생활하는 삶이다.

 부처님 마음 따라 살아가는 이에게 아픔과 쓰라림과 고통은 없다.

 그에게는 오직 광명과 복덕만이 가득할 따름이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그대로 부처님의 자비행에 맞닿아 있을 것이고,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이타행에 바탕을 둔 기도이자 법어일 것이다.

 

 순간을 영원으로 사는 이에게 인류의 멸망이나 지구의 파멸 같은 이야기는 한낱 의미 없는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

 블자들은 한순간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분투하며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순간을 영원처럼 살아간다면 과거 오랜 세월 쌓아 온 업장이 소멸되고,

 우리는 사바세계의 한 송이 아름다운 연꽃으로 피어나게 될 것이다.

 

 

 

 

                                                                  ㅡ 지광스님 (능인선원)

출처 : 아름다운 회향
글쓴이 : 般若池 (반야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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