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찻잔을 채우며 / 동목 지소영
커피 향처럼 은근히 쓴맛을
고백을 할까
허락되었던 삶에
게을러 녹이 슬었다고
허함을 이야기할까
지나고 돌아보니
내가 마신 술은 세상보다 독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마다
쓸쓸했던 그림자
사치였다고 그 어느 날을 모른다 하리
빈 찻잔에 하얀 우유를 채운다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채 떠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풀어 넣는다
더러는 기다렸다는 듯 녹고
더러는 버티는 알 수 없는 외로움
굵은 숟가락으로 톡톡 덩어리를 깬다
남은 길, 저만치 끝이 보인다
새 잉태에 흥분했던 그날들
아, 인생은 꽃망울 터지는 날만은 아니었던 것을
사랑이라 외친 입술뿐인 위장은
파랗고 괴로운 족쇄였다
화롯가 놋그릇에 하얀 김이 보글거린다
달리기만 했던 세월처럼
오늘은 커피 한 잔과 당신을 마주 앉아
가슴의 빗장을 뜯고 싶다
못이 깊어 뽑아낸 자리가 횅하다
팔 한 뼘의 곁에서도
침묵으로 외면했던 고문
이제 용서해 달라고,
살아온 이야기들, 수평선의 너그러움으로
온화하게 마시며 손을 잡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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