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北서 16년간 망명생활하다 세상밖으로… 적도기니 前대통령 딸의 고백

기쁘리 2013. 9. 7. 06:34

 [Why] [김신영 기자의 별★ 사람] 北서 16년간 망명생활하다 세상밖으로… 적도기니 前대통령 딸의 고백

입력 : 2013.09.07 03:38

'養父 김일성'이 물었죠거친 자본주의 세상서어떻게 살아가겠냐고…전, 꿋꿋하게 잘삽니다

"외로울땐 조용필 '친구여' 부르고, 힘들땐 들국화 '행진' 들으며 버티죠"


	서울 소공동 거리에 선 모니카의 모습.
“지칠 때마다 들국화의‘행진’을 들으며 버텼죠.”사촌 동생에게 축출돼 사형된 적도기니 초대 대통령의 딸인 모니카 마시아스는 일곱 살 때부터 16년 동안 북한에 망명해 살았다. 대학 졸업 후 북한을 떠나 스페인·미국·한국을 옮겨 다니며 산 그는“내 고향은 한반도”라고했다. 지난 3일 서울 소공동 거리에 선 모니카의 모습. / 이덕훈 기자

평양의 일곱 살 소녀는 '깜대'라고 불렸다. 어떤 아이들은 '양머리'라고도 했다. 냉전이 한창이던 30년 전 '닫힌 도시' 평양에 사는 흑인 여자 아이 모니카 마시아스는 이방인이고 별종이었다. '깜대'는 검둥이, '양머리'는 곱슬머리라는 뜻이다.

적도기니 초대 대통령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의 막내딸 모니카는 일곱 살 때인 1978년부터 열여섯 해를 평양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쿠데타 조짐이 보이자 모니카와 언니 마리벨, 오빠 파코를 북한으로 망명시켰고 이듬해 축출돼 사형당했다.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은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대통령의 사촌 동생이었다.

1994년 평양에서 나온 모니카는 스페인, 미국, 한국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지금은 스페인에서 원단 무역업을 하면서 한국 동대문 원단 시장과도 종종 교류한다고 했다. 모니카가 가장 잘하는 말은 일곱 살 때부터 배운 '조선말', 즉 한국어다. 그는 꿈도 한국어로 꾼다.

최근 나온 책 '평양의 모니카'에 적힌 모니카 마시아스(41)의 약사(略史)를 읽고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알던 세상과 너무 멀어 보였다.

지난 3일 서울 태평로의 한 찻집에서 모니카를 기다리며, 이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여인은 분명히 방어적이고 어두우리라고 상상했다. 햇볕이 따갑던 오후, 금색 꽃무늬가 수놓아진 파란 치마에 흰 셔츠를 입은 모니카와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뜨끈한 유자차 한잔 했으면 좋겠는데…. 더운 날일수록 펄펄 끓는 걸 먹어야 해요.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잖아요?" 분명 흑인인데, 표정이나 말투가 넉살 좋은 한국 아주머니다. "사투리 안 쓰시네요"라고 물었더니 깔깔 웃었다. "'이보라우. 차 마시라우' 이럴 줄 알았어요?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북한 말은 대부분 아주 북쪽 끝 지역인 자강도 지역 말이에요. 평양 말은 서울말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지난 3일 동대문 원단시장을 찾은 모니카.
지난 3일 동대문 원단시장을 찾은 모니카. / 이덕훈 기자

모니카가 한국말로 이야기하는 동안 옆자리의 손님들이 힐끔거리며 수군댔다. 그는 '신기한 사람' 취급당하는 데 익숙하다고 했다. 평양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10년 동안 산 스페인에서 친구들은 그를 '특이한 여자애'란 뜻의 스페인어 '코시타 라라'라고 불렀다. 그가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는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냐'라는 질문이다. 같은 질문을 던졌더니 모니카는 이렇게 답했다. "한반도 사람."

◇"김일성은 '잔소리 많은 할아버지'"

―만나는 사람마다 신기하다고 놀라죠?

"전 서울서 지하철 타고 있을 때 한국 친구가 전화하면 안 받아요. 제가 한국 말을 하면 너무 충격을 받는 사람이 많아서. 평양에서도 저는 기이한 사람이었어요. 대학 때 친구와 제가 조선말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신기해서 쳐다보다가 나무에 들이받은 아저씨도 있었어요, 하하."

―모니카씨의 아버지는 왜 하필 평양으로 자녀들을 보냈을까요?

"우리 아버지가 공산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건 아니었어요. 적도기니는 1968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에 너무 가난해졌어요. 그때 러시아, 중국, 그리고 북한 등이 적도기니를 지원했어요. 그 과정에서 아버지는 김일성 주석과 친분을 쌓았고, 쿠데타가 날 조짐이 보이니까 김일성에게 편지를 보내 저희를 부탁한 거죠. 아버지가 김일성과 (공산주의)사상을 나눈 건 아니었다고 해요."

―유학 시절 김일성과는 종종 만났나요?

"김일성은 공식적으로는 우리 양부(養父)였지만, 만난 건 세 번 정도밖에 되지 않아요. 엄마는 우리와 함께 평양으로 왔다가 돌아갔는데, 엄마가 있던 몇 개월 동안 김일성은 우리를 '주석부'(김일성 집무실) 옆에 있는 아파트에 살게 했어요. 김일성을 만난 건 모두 그때였어요. 엄마는 적도기니에 남아 있는 큰오빠가 걱정된다며 돌아갔고 우리는 아파트를 떠나 북한의 귀족학교 격인 '만경대혁명학원'을 다니며 기숙사에 살았어요. 그 후엔 김일성을 직접 본 적은 없어요. 새해에 김일성이 과일과 초콜릿이 든 선물 상자를 보내고, 주석부 비서실을 통해 이따금 안부를 묻는 정도였죠."

―김일성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제 기억 속 김일성 주석은 '잔소리 잘하는 할아버지' 정도? '품위 있는 여성이 되어야 한다' '의리를 모르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같이 예절과 관련한 훈계를 많이 했어요. 한 번은 김일성 부인 김성애가 식사 자리에 동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분은 참 말이 없었던 기억이 나요. 듬직, 아니 무뚝뚝한 여성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북한의 귀족학교 '만경대혁명학원'의 초등학교 과정 격인 '인민반'졸업 기념사진.
북한의 귀족학교 '만경대혁명학원'의 초등학교 과정 격인 '인민반'졸업 기념사진. 1981년 7월 찍었고, 동그라미 안이 모니카다.

―생활은 어떻게 했어요? 용돈을 받았나요?

"먹고 자는 것은 기숙사에서 해결하니 돈이 별로 필요하진 않았어요. 때때로 주석부에서 용돈이 나오기도 했고요. 북한은 돈이 세 종류였어요. 일반 사람들이 쓰는 건 한국 만원짜리와 비슷한 색의 '초록 돈'이에요. 외국 돈을 바꾼 돈은 '파란 돈'이고, 학생들에게 주는 돈은 '빨간 돈'이었죠. 가끔 우리에게 빨간 돈이 나왔어요. 평양의 가장 큰 백화점인 '락원백화점'에선 파란 돈만 받았어요. 우리는 백화점에서 사고 싶은 게 생기면 다른 나라 유학생들이 가진 파란 돈을 빨간 돈과 바꿔 썼어요. 물론 뒷거래였고, 환율도 유학생끼리 대충 만들었죠."

◇"거친 자본주의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느냐"

모니카는 북한에서 몇몇 친한 친구들을 만들었다. 깊은 우정을 나눈 친구도 있었지만 서로를 감시해야 하는 제한적 우정에 괴로워했다. 짝사랑하던 북한 오빠에게 "사랑은 같은 세계의 사람들끼리 하는 것"이란 말을 듣고 밤새 울기도 했다. 모니카는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한 후 '어디 가서도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익히라는 김일성의 권유로 평양경공업대 피복공학과에 진학했다.

모니카는 대학 졸업 후인 1994년 여름, 직접 눈으로 다른 세상을 보고 싶어 북한을 떠나 스페인으로 갔다. "제 뿌리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었지만 아버지를 몰아낸 삼촌이 집권하고 있는 적도기니로 가기는 두려웠어요. 어머니가 스페인계 분이셨기 때문에 일단 스페인부터 가보자는 생각이었죠." 모니카는 북한을 떠나겠다는 뜻을 주석실에 전달했다. 김일성은 비서를 통해 '혼자 힘으로 거친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겠느냐'라고 물어 왔다. 모니카는 "나 스스로에게 수 년 동안 던져온 질문이어서 갈등할 필요도 없었다.'떠나겠다'는 내 답을 전달받은 주석실에서는 스페인 마드리드까지 갈 수 있는 경비를 보냈고, 그것이 내가 김일성에게 받은 마지막 지원이었다"고 했다. 김일성은 모니카가 평양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1994년 7월) 사망했다.

―자본주의를 겪어본 지금, 김일성의 마지막 물음에 대해 어떤 답을 할 수 있나요.

"김일성 말대로 자본주의는 정말 거칠더군요. 스페인과 미국엔 취업 비자가 없는 상태로 일단 가서 가사 도우미, 식당 청소, 기념품 판매 같은 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모아 도시에 자리를 잡았어요. 첫 일자리는 3층짜리 저택 청소였어요. 구석구석 쓸고 닦고 돌아오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몸이 쑤셨죠. 돈이라는 걸 벌기 위해 그렇게 일을 해야 하는 줄 그 전까지는 몰랐어요. 그렇게 일해서 받은 첫 월급이 얼마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땀 흘려 번 돈'이 주었던 짜릿한 희열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해요. 북한에서 받던 '빨간 돈'과는 차원이 다른 굉장한 뿌듯함이 있었어요. 지칠 때마다 저를 이끌어준 것은 북한에서 처음 들은 남한 가요, 들국화의 '행진'이었어요. 힘이 들면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나의 과거는 힘이 들었지만… 행진 행진 행진하는 거야'라고 흥얼거렸고, '앞만 보고, 웃으면서'라고 다짐하면서 어려움을 버텼어요."

1995~1996년 북한에 연달아 난 대홍수를 시작으로 북한의 경제는 본격적으로 무너져 갔다. 모니카는 2004년에 스페인 단체관광객 사이에 끼어서 다시 평양을 찾았다. 그는 10년 만에 본 평양의 모습이 "슬펐다"고 했다.

―10년 사이에 그렇게 많이 바뀌었던가요?

"아니요. 정반대였어요. 시간이 멈춰 있는 도시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도시라는 게 변하고 발전해야 하는데 똑같았어요. 형태는 그대로인 도시가 낡아가는 모습을 보는 게 마음이 아팠어요. 1980년대 제가 평양에 있을 땐 락원백화점에 서울 롯데백화점 본점보다 사람이 많았어요. 일본에서 가져온 고급 물건들이 가득 차 있었죠. 그런데 2004년의 백화점엔 손님이 없었어요. 물건은 모두 질 낮은 중국산이었고…. 참 슬펐어요."


	1980년대 초 평양 만경대혁명학원의 김일성 동상 앞에서 모니카 마시아스의 삼남매가 기념사진을 찍었다.
1980년대 초 평양 만경대혁명학원의 김일성 동상 앞에서 모니카 마시아스의 삼남매가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모니카, 언니 마리벨, 오빠 파코. / 예담 제공

◇'남한 사람 불쌍해 보이지 않잖아!'

북한에 살던 시절 모니카가 처음으로 본 한국 사람은 김완선, 김흥국, 조용필이었다. 대학생 시절 중국과 시리아 유학생들은 한국 노래 CD와 비디오테이프를 구해다 즐기면서 모니카에게도 소개했다. 한국과 미국 문화를 접하는 건 유학생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었다. 많은 남학생들은 김완선을 '여신(女神)'으로 여겼고, 모니카는 조용필에게 완전히 빠졌다. 그는 "지금도 조용필을 가장 좋아한다. 조용필 사인 한 장 구하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연예인이 아닌 사람 중엔 1989년 입북한 임수경이 처음이었다. 패션을 전공하던 모니카는 통일이나 정치엔 큰 관심이 없었지만 원고 없이 연설하는 임수경의 자연스러움이 신기해 보였고 그를 따라 한답시고 북한 여성들 사이에 단발머리가 유행했다고 기억했다. 모니카가 대중매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남한 사람'을 본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였다. 홀로 떠난 중국 베이징(北京) 여행에서였다.

―왜 중국 여행을 갔습니까.

"친하게 지내던 시리아 유학생 친구가 있었어요. 어느 날 그가 북한 기관지인 '로동신문' 위에 털썩 앉길래 제가 난리를 쳤어요. 신문에 김일성 주석의 사진이 있었기 때문에 그걸 깔고 앉는다는 건 '수령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했어요. 그때 그 친구가 놀리듯 했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넌 그럴 수도 있겠다. 여기서만 쭉 자랐으니까.' 청소년 시기를 자기 나라에서 보낸 친구들과 달리 저는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보냈고, 그래서 바깥세상을 하나도 모른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쉽게 갈 수 있는 중국에 한번 가보기로 한 거죠."

―중국이 한창 개혁·개방을 하던 시기였죠.

"중국에 가겠다는 저에게 한 북한 친구는 '중국이 개방을 하기 시작했다는데 그건 무질서해진다는 뜻이야. 조심해야 한다'고 조언을 했어요. 그만큼 '개방'은 우리에게 무서운 일로 여겨졌던 거죠.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꼬박 24시간을 달려 베이징역에 도착했어요. 역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건물에 거대한 광고판이 붙어 있었어요. 제가 만난 첫 '자본주의'였어요. 커다랗고 예쁜 눈에 말도 안 되게 긴 속눈썹이 보였어요. 마스카라 광고였죠. 광고라는 걸 난생처음 봐서 '면역'이 없었던 저는 그 매력적인 눈에 정신을 못 차리겠더군요. 그 마스카라를 너무나 갖고 싶은 그 간절한 마음이란…. 전 그 큰 눈을 보면서 한 시간을 역 앞에 앉아 있었어요.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어요. 오빠가 수소문해 알아낸 먼 친척네 집에 가기로 돼 있었거든요."

모니카는 친척 집 주소 하나 달랑 들고 베이징에 갔다.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큰 도시일 줄 몰랐다"는 그는 길을 물으려 했지만, 중국어를 할 줄 몰랐다. 할 줄 아는 말은 '모국어'인 한국어와 대학서 배운 스페인어, 영어였다. 그는 백인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캔 유 스피크 잉글리시(영어 할 줄 아세요)?"라고, 반가운 마음에 길을 물었다. 그러나 백인이 설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뒷걸음쳐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 백인이 어릴 때부터 너무나 무섭게 여겼던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식은땀이 흘렀다. 눈치를 보다가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쳐서 아무 택시나 잡아탔다"고 했다.


	북한에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모니카(오른쪽)와 김일성의 부인인 김성애(왼쪽).
북한에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모니카(오른쪽)와 김일성의 부인인 김성애(왼쪽). 모니카는 김성애를‘무뚝뚝한 여자’로 기억했다./ 예담 제공

―북한에서 미국 사람은 아주 무섭다고 가르치나 봐요.

"전쟁박물관에 가면 미군이 북한 사람을 살해한 끔찍한 사진이 엄청나게 진열돼 있어요. 그런 사진을 반복해서 보면 누가 나한테 반미(反美) 하지 말라고 가르쳐도, 미국을 미워할 수밖에 없어요. 남한 사람에 대해선 좀 달랐어요. 불쌍하게 여겼어요. 저렇게 무서운 미국 사람과 교류하며 살아야 한다고…."

―지금도 미국인이 꺼려지나요?

"하하, 아니죠. 전 스페인에서 10년을 산 다음에 미국 뉴욕에서 3년을 살았어요. 2004년 평양을 관광객으로 방문했을 때 만난 미국인은 '미국을 모르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지요. 실제로 본 미국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였어요. 무엇보다 사람들이 열려 있었어요. 뉴욕 사람 중에 상당수는 제 과거를 듣고도 '그래?' 하고 넘어갔어요. 참 편한 도시였어요."

―베이징에서 만난, 모니카씨의 첫 한국 사람들은 어땠나요?

"길에서 한국 말을 하는 아저씨들이 있길래 말을 걸었죠. 제 소개를 듣더니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어요. 사업상 베이징을 찾은 아저씨들이었어요. 한식을 먹고 노래방에 갔어요. 조용필의 노래들을 부르면서 신나게 놀았어요. 그때 생각했죠. '뭐야. 평양 사람들과 비슷하잖아. 불쌍해 보이지도 않고!'"

―그 여행에서 편견이 많이 깨졌군요.

"그때 깨달았죠. '내가 직접 보고 느끼지 않은 것을 사실이라고 믿었다가는 크게 실수할 수 있겠다'라는 것을요. 이후에 여러 나라에 살면서 저는 제가 베이징의 미국인을 보고 도망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저를 대하는 사람을 많이 만났어요. 한국말을 하면 반가워하다가도 '조선말 평양에서 배웠다'라고 하면 표정이 싸늘하게 변해 뒤돌아서는 사람들요. 심지어 제 한국인 친구에게 '모니카 혹시 간첩 아니야? 조심해'라고 경고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해요. 정말 많은 사람이 '학습된 증오'에 빠져 산다는 생각을 했어요."

모니카는 스페인 10년, 미국 3년을 거쳐 2007년 서울에 왔다. "제가 자라난 땅(북한)의 또 다른 쪽이잖아요. 예전부터 꼭 와보고 싶었고, 직접 접하고 부딪치고 알고 싶었어요." 그는 "정치와 경제 문제를 싹 빼고 사람만 보면 남북한 사람들은 참 비슷했다"고 했다. "우와… 근데 서울은 정말 일을 많이 하는 도시예요. 어떻게 사람들이 이토록 일만 하고 살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하하. 저는 북한에서 알던 중국 언니가 하던 의상 회사에 취직했지요. 오전 10시부터 12시간을 일했지만 마음은 고향인 듯 편했어요."


	2000년대 초 미국 뉴욕에서 살던 시절 맨해튼코리아타운 부근에서.
2000년대 초 미국 뉴욕에서 살던 시절 맨해튼코리아타운 부근에서. 그는“미국은 참 열려 있는 나라”라고 했다./ 예담 제공

◇자유의 가장 큰 적은 증오

스페인, 미국, 한국을 오가며 살던 모니카에겐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서 떨치지 못한 거대한 원수가 한 명 있었다. 아버지를 죽게 한 '삼촌'(정식 명칭은 당숙이지만 모니카는 아버지의 사촌동생을 삼촌이라 불렀다)이자 적도기니의 대통령인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 대통령이다. 그는 모니카가 고등학생일 무렵 평양을 찾아온 적이 한 번 있다. 분위기는 살벌했다. 언니 마리벨은 대통령이 건넨 돈 봉투를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동생들의 손을 잡고 돌아 나왔다. 그는 책에 이렇게 썼다. "그 사람은 우리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내 가슴속에 영원히 시들지 않을 증오의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응게마는 '독재자'라며 삼촌을 몰아낸 후 자신도 사실상 일당독재를 하며 장기집권하고 있다. 뉴욕에서 생활하던 2006년 9월, 모니카는 예상치 못한 어느 날 그 삼촌과 다시 만난다. 뉴욕 유엔에서 근무하는 사촌 오빠가 주선한 만남이었다. 그때 응게마는 유엔총회에 참석하려고 뉴욕에 와 있었다.

―거부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사촌 오빠는 누군지도 얘기해주지 않고 '만날 사람이 있다'며 저를 한 호텔로 데려갔어요. 로비에서야 만날 사람이 삼촌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뉴욕에서 나름 저를 챙겨주었던 오빠가 인사만이라도 하고 가라면서 저를 설득해서 매몰차게 거절하기가 어려웠어요. 솔직히, 너무나 보기 싫었고 괴로웠어요. 당연하잖아요. 머릿속이 완전히 엉키고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상태로 방에 들어갔어요."

―정말 인사만 하고 나왔나요.

"'잘 지내니' '네' '돈은 있냐' '네'…. 두세개 정도 형식적 문답이 오갔고 저는 그만 가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삼촌은 알았다면서 쇼핑백 하나를 주더군요. 20년 전 언니에게 돈 봉투를 건넸듯이, 저에게도 돈을 주려고 한 거죠."


	마리벨 언니의 생일잔치에 삼남매와 한 북한사람이 모여 앉은 모습.
마리벨 언니의 생일잔치에 삼남매와 한 북한사람이 모여 앉은 모습./ 예담 제공

모니카는 몇 초 동안 갈등을 했다. 언니가 그랬듯 돈을 찢어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도 들었다.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젠장… 이 사람을 증오하는 게 이제 너무 힘들어! 계속 이런 상태로 살 수는 없잖아.' 그는 언니와 다른 선택을 했다. 증오를 포기하고, 돈이 든 봉투를 받아 나왔다.

―돈이 필요해서였나요?

"아니에요. 전 스페인에서 '일해서 번 돈'의 매력을 알게 됐고 '땀 흘려 벌지 않은 돈은 내 돈이 아니다'라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어요. 돈은 삼촌을 용서한다는 상징적 물건에 지나지 않았어요. 호텔을 나와서는 한국인 친구들을 만나서 흥청망청 돈을 써버렸어요. 값비싼 명품 매장이 즐비한 뉴욕 맨해튼 5가에 가서 친구들에게 옷과 액세서리를 사줬어요. 1만달러(약 1090만원) 넘게 들어 있던 돈을 그냥 대충 써버린 거예요."

―그렇게 간단하게 용서가 되던가요?

"저도 진짜 희한해요. 너무 오래도록, 크게 미워하다가 지쳐버린 것도 같아요. 그런데 일단 마음을 정하고 나니까 너무 편해졌어요. 피해 다녀야 할 사람이 없어졌다는 게 아주 좋았어요. 자유로워진 거죠. 그때 알았어요. 자유의 가장 큰 적은 증오라는 것을요."

모니카는 지난해 친척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적도기니를 찾았을 때 삼촌을 다시 만났다. 모니카가 먼저 나서서 스페인에서 배운 대로 양 볼에 입을 맞췄다. 대통령은 모니카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라시아스, 치카." '고맙다, 얘야'라는 뜻이다.


	스페인에선 댄서로 스페인 마드리드에 살던 시절 즐겨 찾던 카페‘다마스코’에서.
스페인에선 댄서로 스페인 마드리드에 살던 시절 즐겨 찾던 카페‘다마스코’에서. 춤추기를 즐겼던 모니카는 당시 대형 인테리어 업체에 다니면서 주말엔 이 카페에서 공연을 했다.

◇도전하는 사람은 이별과 친해야 한다

모니카가 말을 할 때 몇 번은 그가 어느 나라 이야기를 하는지 헷갈렸다. '우리나라' '조선말' '한국' '조선' '남한' 같은 말들을 그는 마구 섞어가며 말했다. '우리나라'는 북한, 한국, 적도기니에 두루 썼다.

―정착해야 한다는 생각 안 드나요?

"스페인에서 사귀던 남자친구가 있었어요. 제가 뉴욕에 꼭 가겠다고 했고 그래서 이별했지요. 그는 헤어질 때 저를 응원하겠다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도전하는 사람은 이별과 친해야 한다'고. 그 말을 요즘도 자주 떠올려요."

―이별도 자꾸 하다 보면 익숙해지나요?

"아니요, 전혀. 이별은 '익숙'이 안 돼요. 늘 힘들어요. 그래서 물건이나 살림살이 같은 건 많이 사지도 않고 정 붙이지도 않아요. 평양에 두고온 친구들, 스페인에서 헤어져야 했던 남자친구, 날 스스럼없이 대해줬던 미국의 친구들, 언니, 오빠, 조카들… 사람과 헤어지는 건 늘 힘드네요."

모니카는 친구들이 보고 싶을 때면 조용필의 '친구여'를 부른다고 했다.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 추억은 구름 따라 흐르고….''친구여'는 수백 번 불러도 마음이 먹먹해요. 이런 걸 우리 한반도 사람들은 한(恨)이라고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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