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의 新줌마병법]
엄마와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벚꽃 날리던 날 친정엄마 말씀 ‘빈틈없이 살려 애쓰지 마라
바람난 처녀마냥 햇살도 쬐고 꽃그늘에서 수다도 떨고…
열무김치 담가주랴? 우울증엔 잘 먹는 게 최고지’"
김윤덕 기획취재부 차장
아마도 벚꽃 때문일 겁니다. 순백(純白)의 꽃잎들이 지상으로 낙하하던 날, 불현듯 '엄·마·가·보·고·싶·다'는 생각이 든 건…. 나 아홉 살 적, 아버지와 함께 우리 집에 온 여자.
폐병 앓던 우리 엄마를 간병하다 우리 엄마가 되어버린 여자. 말끝마다 가시를 박아 쏘아붙여도 헤벌쭉 웃기만 하더니, 의붓딸 결혼식장에서 눈물만 훔치던 여자. 허구한 날 김치를 담가 보내는 통에 지청구를 바가지로 듣던 그녀가 제일로 좋아하던 꽃이, 봄날, 저 청승맞게 흩날리는 벚꽃이었습니다.
이맘때면 도발하는 우울증으로 하늘이 노랗던 날,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전화를 겁니다.
"저랑 영화 보러 가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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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고향' 보고 영화는 처음인갑다."
"……."
"근디 콧등에 점 있는 저 여자, 무당 월이 아니냐? 해품달 월이?"
"목소리 좀 낮추세요."
"양장을 입어도 참 곱다. 너 어릴 때도 저렇게 이뻤다. 코가 오똑해서는. 저런 근사한 피아노를 한대 못 사줘서 마음이 짠했었다."
"돈이 어디 있다구."
"약국집 딸이 드레스 입고 서울 가서는 트로피 들고 온 걸 보고 니가 밤새 울었느니라."
"기억 안 나요."
"근디 화면에 나오는 저곳이 대학 강의실이냐? 니도 저런 데서 공부한 거냐?"
"팝콘 드세요."
"니가 공부 하난 야무지게 잘했다. 판사 될 거라고 니 아버지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다."
"목소리 좀 낮추시래두요."
"고시 포기하고 회사에 취직해서는 첫 봉급으로 내복 사왔던 날, 니 아버지가 빈속에 소주를 세 병이나 들이부었지."
"……."
"근디 저 총각은 입에 욕을 달고 사는구나."
"젊은애들이 다 그렇지요."
"말이 그 사람 얼굴이다. 욕쟁이 총각들 뭇매 맞는 것 좀 봐라. 지 부모 욕먹는 줄도 모르고."
"뉴스 열심히 보시나 봐요."
"배웠다는 사람들이 나 같은 무지렁이보다 못하니 한심해서 하는 소리다. 근디 시방 쩌것이 제주도 아니냐?"
"제주도 가고 싶으세요?"
"다시 태어나면 저런 바닷가에 이층집 짓고 살아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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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한번 징허게 좋다."
"영화 재미있으셨어요?"
"재미있지 그럼. 남녀 주인공 결혼하게 됐으니 얼마나 잘됐냐."
"잘된 거 아니고 헤어진 건데…. 남자는 떠나고 첫사랑 여자는 바닷가에서 늙은 아버지 모시고 살잖아요."
"애비 탓이구나. 늙으면 그저…."
"그런 게 아니구요."
"제 짝 아니면 용을 써도 안 되는 게 남녀의 인연이다. 첫사랑이고 막사랑이고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되지."
"우리 아버지…, 좋아하셨어요?"
"성질머린 고약해도 의리는 있었다."
"저 때문에 속 많이 썩으셨죠?"
"그런 일 없다. 있었대두 다 까먹었다. 암만, 내 딸인디"
"……."
"근디 안색이 영 안 좋구나."
"봄이라서 그래요."
"남자라는 물건 별수 없지. 시어머니가 성인군자처럼 구는 것도 재미없다. 애들은 부모 속 썩이라고 하늘이 내려 보낸 애물단지 아니더냐."
"……."
"너무 빈틈없이 살려고 애쓰지 마라. 나도 속물이다아~ 하고 가끔은 괴물처럼 굴란 말이지. 나한테 심통부렸던 것처럼만 퍼부으면 우울증이 왜 걸리누?"
"죄송해요."
"니가 어릴 적부터 속에 쟁여두고 사는 게 많더니, 애를 둘이나 낳고도 그 모양이구나."
"……."
"사람에게서 얻은 병은 사람으로 치유해야 하느니. 바람난 처녀마냥 햇살마중도 하고, 꽃그늘 아래 누워도 보고, 여자들이랑 몰려다니며 이바구도 떨고 그래라. 이도 저도 싫으면 소리라도 박박 지르든가."
"벚꽃을 왜 좋아하세요?"
"송이송이 눈꽃송이 같아 좋다. 다섯 살 적 돌아가신 울 엄마가 젤로 좋아하던 꽃이었지. 널 처음 만난 날도 춘사월 벚꽃잎 흩날리던 날이었다. 맹랑한 눈빛으로 날 노려보는데 어찌나 안쓰럽던지."
"……."
"너는 나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평생 너의 우산이 되어 비 한방울 맞지 않게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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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택배가 왔습니다. 햇고추 갈아 담근 열무김치입니다. 보자기에서 쪽지 한장이 떨어집니다.
"아주 맛나게 익엇따. 미더덕 넣고 된장국 끌일 줄 알쟈?
갓 지은 밥에 된장 넣고 비벼설랑 이놈 언저 먹으면 꿀맛이니라.
우울증엔 그저 잘 먹는 게 최고다. 엄마가."
/ 조선
Song Woon Art Hall